조선왕조실록엔 없는 철종의 '진짜 모습'
일본 문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는 어떤 분이 물었다.
"글쓰기를 배우고 싶은데 어디 가면 배울 수 있을까요? 논문만 쓰다 보니 보통 글들도 다 논문처럼 쓰게 돼요."
문학을 전공했으니 글을 잘 쓸 것 같은데 그 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논문처럼 딱딱한 글이 아닌 독자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그 바람은 비단 그 분만이 가진 것은 아닐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은 의미가 담겨 있으면서 술술 잘 읽히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그래서 작가들은 좋은 문장 하나를 만들기 위해 고심하고 또 하는 것일 터이다.
글을 잘 쓰려면? '경산일록(經山日錄)'에서 배우세요
▲ 용이 일어 난 곳, 용흥궁입니다. | |
ⓒ 이승숙 |
글을 잘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라'라는 말을 금과옥조처럼 여긴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처럼 글 역시 '아는 만큼 쓸 수 있'을 것이다. 또 많이 생각을 해야 자신만의 관점과 창의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으니 그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과제다. 그렇다면 글을 많이 쓰면 어떤 점이 좋을까.
글쓰기의 첫 걸음은 일기쓰기에서 출발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매일 일기를 쓰면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고 그 외에도 좋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중 글쓴이의 개인사가 기록으로 남는다는 점도 빠트릴 수 없는 장점이다.
일기는 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부분들을 담고 있지만 그 시대를 보여주는 경우도 많다. 17세기 정묘호란 때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인조를 호종하고 강화로 왔던 신달도(申達道)는 당시 강화도의 전반적인 상황들을 보고 들은 대로 기록을 한 '강도일록(江都日錄)'을 남겼다. 이 일기는 전란의 상황뿐만 아니라 상소문들의 내용과 청나라와의 화의의 과정 등을 세세히 기록으로 남겨 역사적 자료가 되었다.
또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학 작품이 되었고 한 궁녀가 쓴 '계축일기'를 통해 내밀한 궁중의 비화들을 엿볼 수도 있다. 이순신 장군이 쓰신 '난중일기' 또한 장군의 내밀한 고백이기도 하면서 임진왜란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인 자료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기를 통해서 그 시대를 돌아보며 지혜를 배우기도 하고 나아갈 바를 얻기도 한다. 이처럼 일기의 적층(積層)은 역사적 사료가 된다.
강화나들길 1코스인 '심도역사문화길'은 강화도령이라 불리었던 철종의 잠저(潛邸)를 거쳐서 가는 길이다. 철종이 어떤 인물이었던가, 평민에서 왕이 된 사람이 바로 철종이 아니던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신분의 상승이 이처럼 획기적인 사람이 철종 말고 또 있을까.
▲ 용흥궁. | |
ⓒ 문희일 |
헌종의 마지막과 철종의 시작
철종의 고조할아버지는 영조이고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가 철종의 증조할아버지이다. 그러니 당시 임금이었던 헌종과는 7촌 사이로 가까운 친척이었다. 당시 조정은 외척들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한 때였다. 왕실의 똑똑한 인물들은 역모로 몰려서 다 죽고 남은 사람은 몇 되지 않는 형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의 24대 왕인 헌종이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철종을 왕으로 옹립을 한다. 사람 팔자 시간문제라더니 그야말로 강화도령 철종이 바로 그런 식이었다. 왕족이었지만 또한 역적의 후손이기도 했던 철종은 유배지에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네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사람이 왕이 되었으니 이 어찌 드라마틱한 인생이 아니겠는가.
철종의 집안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그것은 철종이 왕이 되자 신분세탁을 위해 자료들을 다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수렴청정을 하던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철종의 할아버지인 은언군의 집안에 관한 문적(文蹟)을 모조리 세초(洗草)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세초(洗草)란 조선 시대, 역대 왕의 실록을 편찬한 후에 훗날 구설을 막기 위하여 그 초고를 없애던 일을 말하는데, 순원왕후는 은언군에 관한 기록들을 물로 씻어서 글자를 없애 버리라고 한 것이다. 역적 집안의 후손이 왕이 되었으니 어찌 정치적으로 뒷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대왕대비는 그런 위험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 자료들을 다 없애버렸다. 그래서 철종의 집안에 대한 자료는 남아 있는 게 많지 않다고 한다.
왕으로 옹립이 된 철종을 모시러 한양에서 사람이 내려왔다. 봉영(奉迎)의 중책을 안은 사람은 영의정이었던 정원용이었다. 정원용은 정조 7년에 태어나서 고종 10년까지 살았던 분이니 정조를 비롯해서 순조, 헌종, 철종 그리고 고종에 이르기까지 총 다섯 분의 왕을 모셨다.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길에 나선 19살 때부터 91세로 숨을 거두는 그 날까지 70여 년에 걸쳐 일기를 썼는데 그것이 바로 경산일록(經山日錄)으로 개인의 일기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쓴 일기일 것이라고 한다.
▲ 정원용 대감을 비롯한 봉영단 일행이 용흥궁에 오시다. 자료 : <강화도령, 1963> 영화, 감독 : 신상옥 | |
ⓒ <강화도령, 1963> |
정원용의 일기에서 특기할 점은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 하던 때를 왕조실록보다 더 세세히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이다. 긴박했던 순간들을 자세히 묘사한 그 일기들은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마저 들게 할 정도로 장면들을 눈에 보이는 듯이 그렸다.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는 무렵에는 매일 6~7 장씩의 일기를 썼다고 하는데 그 일기들을 한글로 번역 하면 하루에 원고지 30매 이상을 쓴 것으로 볼 수가 있다고 한다. '경산일록(經山日錄)'은 정원용이 살았던 90여 년간의 시대를 보여주는 활동사진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원용이 쓴 '경산일록'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숱하게 그렸던 철종의 등극 과정이 실제로는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자료이다. 그 자신이 봉송을 맡은 책임자였으니 이보다 더 자세하게 기록할 자가 또 있겠는가. 헌종실록이나 철종실록에서는 볼 수 없는 부분들도 '경산일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헌종의 죽음에 대해서 '헌종실록'에서는 명약원윤직(命藥院輪直), '약원에 명하여 윤직(숙직)을 하게 하였다'라는 다섯 글자 밖에 없는데 정원용의 일기에는 이 날의 숨 가빴던 상황들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저녁에 약방장무관이 임금의 상태가 더 나빠졌다고 알려왔다... 임금의 얼굴이 누렇게 떴으며 통통했던 피부도 말랐다... 대신과 각신은 입시하라는 하교가 있었다. 들어가려는 즈음 중희당에서 이미 곡성이 났다."(1849년 6월 5일)
헌종이 승하한 지 이틀 뒤 정원용은 유배 중이던 강화도령 이원범(철종)을 한양으로 모셔오는 중책을 맡게 된다. 일기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 강화도행렬도 江華島行列圖 /부분, 조선미술박물관(평양) 소장 , 자료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 |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
"갑곶진에 이르렀다. 배에서 내리니 강화유수 조형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왕의 ) 생김새와 연세도 몰랐다... 내가 말했다. '이름자를 이어 부르지 마시고 글자 한 자 한 자를 풀어서 말하십시오.' 관을 쓴 사람이 한 사람(철종)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름은 모(某)자, 모(某)자이고 나이는 열아홉입니다..' (대왕대비의) 전교에 있는 이름자였다."
운명 앞에 선 철종, 두려웠을 것이다
정원용의 일기를 통해서 철종이 더 가까이 다가온다. 철종은 존재가 널리 알려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원용의 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왕이 된 사람을 모시러 왔지만 왕의 이름도 생김새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대왕대비가 내린 전교에 있는 사람인지 확실히 알기 위해 이름을 한 글자씩 끊어서 알려달라고 한다.
역사를 읽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 위에 상상력을 보태가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경산일록'을 읽으면서 그 날 그 순간을 눈앞에 그려볼 수 있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에 원범은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다. 형과 아버지가 역모로 몰려 관원들에게 오라를 받고 잡혀갔을 때의 광경이 떠올라 어쩌면 무서움에 벌벌 떨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나도 죽는구나, 나를 잡으러 관원들이 왔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열아홉 살 총각에게 닥친 일은 너무나도 커서 미처 정신을 차릴 새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호사가들은 철종이 자신을 모시러 온 사람들을 보자 울면서 도망을 갔다는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했는가 보다. 어쩌면 도망을 갔을지도 모른다. 누군들 그러지 않겠는가. 그렇게 엄청난 운명 앞에 떨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철종이 형과 함께 가난하게 살았던 초가집은 나중에 번듯한 기와집으로 다시 지어진다. 강화유수였던 정기세가 왕이 살았던 집과 왕의 외갓집을 왕의 지위에 어울리게 크게 짓는다. 그것이 오늘의 용흥궁(龍興宮)이다.
▲ 용흥궁입니다. | |
ⓒ 문희일 |
용흥궁에서 철종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도 꽤 흥미 있겠지만 '정원용'과 '정기세'를 떠올려 보는 것도 유익한 경험이 될 것이다. 정기세는 정원용의 아들이니 부자(父子)가 나란히 철종과 깊은 연관을 맺었다. 용흥궁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이 두 부자의 치적을 담은 비석이 서있다.
정원용이 남긴 '경산일록'은 그의 증손자인 위당 정인보에 의해 연세대학교에 기증된다. 당시 연세대학교 교수였던 정인보는 증조부인 정원용이 70여 년간 쓴 일기와 또 종조부인 정기세가 50년 동안 기록한 일기 15권 및 백부인 정범조가 39년 동안 기록한 일기 19책을 모두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 기증한다. 정인보는 정제두에서 시작된 강화 양명학파의 마지막 계승자이기도 하니 동래 정씨 집안과 강화도가 맺은 인연은 참으로 각별하다고 할 것이다.
정원용이 쓴 일기를 통해서 당시의 시대상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으니 개인의 기록이 역사가 되었다. 더구나 그의 후손들 역시 기록을 하는 전통을 이어 내려왔으니, 만약 위당 정인보 선생이 한국전쟁 때 납북이 되지 않았다면 위당이 산 시대(1893~?)도 우리는 생생하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쟁이 위당의 역사를 빼앗아 가버렸으니 우리 민족의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역사를 찾는 길과 만드는 길
우리 민족은 기록하는 것에 약하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원래부터 기록에 약한 만족이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방책으로 기록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글은 말과 달라서 기록으로 오래 남는다. 그러니 한 번 잘못 쓴 글은 평생 그의 족쇄가 될 수도 있다. 심지어 글을 잘못 써서 죽음에 내몰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당쟁으로 얼룩졌던 조선시대에 사사로이 글을 남긴다는 것은 곧 상대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일기를 비롯한 기록물을 남기는 것에 인색했던 것이다.
▲ 용흥궁. | |
ⓒ 문희일 |
또 옛날에는 읽고 쓰는 것이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었다. 일반 평민들은 글을 배울 수 없었으니 기록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기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더구나 날로 발전하는 전자매체를 통해 기록을 남기는 것은 더 쉬워졌다. 그 모든 기록들은 개인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넓게 보면 우리 시대를 나타내는 타임캡슐이 될 수도 있다.
강화의 어제를 연구하고 공부해서 오늘에 되살리는 사람들이 있다. '강화역사문화연구소'의 김형우 박사는 강화를 주목했다. 우리 민족의 전 역사가 담겨있는 강화를 아는 것이 곧 우리 민족의 역사를 아는 것이라는 데 착안을 하고 강화의 어제를 탐구했다. 강화의 백 년 전을 그린 '심도기행'이라는 책도 강화역사문화연구소에서 발굴해서 되살렸다.
강화의 곳곳을 누비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사진이 지금은 한 장의 사진일 뿐이지만 세월이 지나면 강화의 오늘을 그려내는 중요한 자료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이렇게 강화를 공부하고 누비는 그들이 강화에서는 이 시대의 정원용이고 또 백 년 전의 강화를 글로 남긴 '심도기행'의 작가 화남 고재형 선비이기도 하다. 그들 속에 나 또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영광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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